천주교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
사랑이 없다면
가정은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이 없다면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가정공동체 18항)
       
 
공개보도자료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4-29 (화)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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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 26년간 110여 개국 순방한 평 ”

한국교회에 대한 특별한 사랑에 1984, 1989년 두차례 방문

 '20세기 위대한 목자' 복자 교황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두 복자 시성식 미사가 27일 오후 4시 50분(한국시각, 평화방송 TV 위성생중계 예정) 바티칸에서 거행된다. '제2의 성령강림'으로도 불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1881~1963)와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어떤 인물이었나.


▲ 2002년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청년들에게 인사하는 교황.
▲ 로마 인근의 레베비아 교도소를 찾아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터키인 청년 알리 아그자를 만나고 있는 교황 모습.
▲ 공산주의 붕괴에 크게 기여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고르바초프와 이야기하는 모습.
▲ 한국을 두 차례나 방문해 남다른 사랑을 보여줬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일치와 평화의 파수꾼

 1981년 5월 13일 오후 5시 17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알리 아그자라는 터키인 청년이 수많은 인파 속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향해 권총을 빼들고 두 발을 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다. 다행히 총탄은 중요 장기를 비켜 갔고, 교황은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이후 교황 저격 배후에는 당시 동유럽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소련 공산당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2년 6개월 후, 교황은 로마 인근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았다.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알리 아그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충혈된 눈에 면도도 하지 못한 초췌한 청년 알리 아그자는 20분 동안 교황을 만났다.

 이에 앞서 교황은 저격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후에 "나는 내게 총을 쏜 우리의 형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라는 말로 알리 아그자를 공개적으로 용서했다.

 1978년 10월 16일, 58세의 젊은 나이에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는 456년 만에 처음 선출된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자 폴란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는 피선 이튿날인 10월 17일 추기경단 연설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온전한 실현에 헌신하겠다고 선포했다.

 '평화의 사도'로 불린 그는 1979년 1월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개막하기 위해 멕시코 푸에블라를 방문하면서 땅에 입을 맞추고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보편교회 목자로서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5개 대륙에 있는 110여 개국 이상의 국가를 사목방문하면서 신자들을 만났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을 두 번이나 찾았다. 1984년 첫 방문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을 위한 것이었다. 5월 6일 여의도 시성식은 로마가 아닌 해외에서 교황이 시성식을 집전한 첫 사례이기도 했다. 5년 후인 1989년에는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교황은 인종ㆍ종교적 갈등과 대립의 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의 화해와 평화를 호소했다. 세상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포클랜드 전쟁과 걸프전, 유고슬라비아 사태, 루안다 내전 등 교황은 분쟁이 발생하는 곳이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고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86년 4월, 교황은 가톨릭교회 수장으로서는 처음 유다교 회당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86년에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세계 기도 모임을 개최하는 등 종교 일치 운동에 힘썼다.

 1990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과 처음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공산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붕괴로 이끈 자신의 개혁 노선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평화와 일치의 사도였던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과오를 인정하고, 세상과의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1992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의 교회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진보적이었고, 신앙과 윤리 문제에는 단호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주교를 파문했으며, 피임과 낙태ㆍ동성애 문제에 있어서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밖에도 교황은 재위 26년여 간 교회와 사회를 위해 새로운 틀을 짰다.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쏟은 교황은 1985년에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세계 청소년주일(한국교회는 5월 마지막 주일)로 제정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2~3년마다 각 대륙을 돌며 세계청년대회를 개최한다. 교황은 또 1992년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기 위해 2월 11일(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선포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이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남부 마을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어려서 어머니와 형을 잃고 독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10대에는 시를 짓고 수영을 좋아했다. 연극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산에 오르고 소풍 다니는 것을 즐기는 낭만파 청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다른 삶을 열어줬다. 그는 사제성소를 결정한 핵심에는 전쟁의 상처와 아버지의 죽음이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교황은 2005년 4월 2일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지상순례를 마감했다. 선종 때 이미 "산토 수비토(santo subito, 즉시 시성을)"라는 환호를 받은 교황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 헌신한 평화의 사도로 칭송받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평화신문/1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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