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
사랑이 없다면
가정은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이 없다면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가정공동체 18항)
       
 
공개보도자료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4-29 (화) 09:26
ㆍ조회: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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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성-요한 23세 교황] 현대 교회의 '새 장'을 활짝 연 착한 목자 ”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폐막 보지 못한 채 선종


 '20세기 위대한 목자' 복자 교황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두 복자 시성식 미사가 27일 오후 4시 50분(한국시각, 평화방송 TV 위성생중계 예정) 바티칸에서 거행된다. '제2의 성령강림'으로도 불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1881~1963)와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어떤 인물이었나.

▲ 교황 요한 23세가 1963년 4월 11일 회칙 「지상의 평화」에 서명하고 있다. 「지상의 평화」는 진리와 정의, 사랑, 자유를 토대로 하는 모든 민족의 평화에 대한 요한 23세의 회칙이다. 【CNS】
▲ 요한 23세 교황의 공식 초상화. 단순하지만 사회적 의식과 유머를 갖췄으며, 마음이 따뜻한 교황으로 기억된다. 【CNS】
▲ 1963년 6월 그의 장례식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는 요한 23세 교황 유해. 【CNS】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

 '착한 교황'으로 불리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소집,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문을 열어 젖힐 수 있도록 '대변혁'을 이끈 요한 23세(재임 1958~1963) 교황. 그를 이야기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빼놓을 수 없다. 또한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 자체도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 선종 이후 후임자를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두 추기경의 투표 결과도 막상막하였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은 제3의 인물이었던 요한 23세를 선출한다.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추기경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총대주교였다.

 당시 77세 고령이었던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교황 후보로도 거론되지 않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당시 추기경들은 그를 '과도기적 교황'으로 여겼고,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해 11월 4일 즉위식에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한 뒤 교회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교황 피선 후 첫 번째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토 5세(1585~1590) 규정을 폐지하고, 1958년 12월 23명의 새 추기경을 임명했다. 이 새 추기경단에는 훗날 자신의 후임 교황이 되는 바오로 6세(재임 1963~1978)가 되는 몬티니 추기경도 포함돼 있었다.

 요한 23세의 가장 큰 업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이다. 그는 취임 100일이 채 되지 않은 1959년 1월 25일, 바오로의 개종 축일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들 앞에서 지금 교회는 답답하니 "창문을 열고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으면 한다"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을 선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3년의 준비를 거쳐 1962년 10월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 세계 주교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엄하게 개막했다.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 to, 현대화)'가 표어였다. 회칙 「지상의 평화」도 반포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공의회 폐막을 보지 못한 채 1963년 선종한다.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그는 가톨릭교회가 새천년기 전야의 인류를 향해 열린 교회가 되도록 초석을 다졌다. 그는 선종 뒤 후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됐으며, 2000년 9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선종 37년 만에 시복됐다. 이제 27일 시성되면, 그는 복자품에 오른 지 14년, 선종한 지 51년 만에 성인으로 추대된다.

 요한 23세가 베네치아대교구 총대주교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선종 때까지 10년 동안 개인비서로 봉직했던 로리스 프란치스코 카포빌라 추기경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교황 요한 23세」(바오로딸)에서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고 종교심이 깊었으며 특별함이나 감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몸과 정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권력가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론칼리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요한 23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12㎞ 떨어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농부 조반니 론칼리의 13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상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2년간 교육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서 신학공부를 하던 1902년 10월, 그는 영성지도자 피토키(구속주회)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부터 일기인 「영혼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영혼의 일기」는 요한 23세의 생애와 영적 발걸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다.

 1904년 신학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사제품을 받은 그는 베르가모의 테데스키 주교 비서로 임명돼 1914년 주교가 선종할 때까지 봉직한다. 교구장 비서로 지내면서 교구사 등에 대한 연구도 펼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1918년에는 의무대를 거쳐 군종사제로도 복무했다.

 1925년 아레오폴리스 명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불가리아 감목 대리로 파견됐다가 1935년 대주교가 된 뒤 1944년까지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사절로서 이스탄불에서 근무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이어서 교회는 다른 신앙을 믿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타 종교가 교황청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던 시기였음에도 그는 터키 정부 각료들과도 친교를 쌓았다. 또 동방교회 신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 일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 점령당한 그리스를 도왔으며, 유다인들이 나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는 데 모든 힘을 다했다. 1953년 1월 12일 추기경에 서임된 그는 1월 15일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됐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재 프랑스 파리 교황사절이던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 운석 장면(요한) 박사를 여러 나라 대표에게 소개했고, 그 뒤 50여개 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평화신문/1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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