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
사랑이 없다면
가정은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이 없다면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가정공동체 18항)
       
 
혼인과 가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1-13 (화) 10:45
ㆍ조회: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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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김익진 프란치스코 <1> ”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1. 말을 좋아하는 소년
▲ 만년의 김익진
 
낙엽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참 좋다. 구두 밑창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도 새롭다. 싸늘한 초겨울의 정취가 싫지만은 않다.
“춥지 않으세요?”
“춥긴? 우리 수녀님이 꼭 붙어 있는 걸.”
순간 휘청한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눈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요즘은 두 눈이 다 성치 않다. 뿌옇게 형상만 보일 뿐이다. 팔짱을 끼고 있던 화영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아버지, 찻집에서 잠깐 쉬었다 가요.”
차 향이 은은하다. 귀에 익은 음악이 놀란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Le quattro stagioni(사계)로구나. 작품번호 Opus 8, No.4. F단조의 L‘inverno(겨울)!”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영이가 화답한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궁정연주회에서 즉흥적으로 ‘봄’ 악장을 연주하라고 했던 바로 그 곡!”
나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화영이는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가 떨리고 발이 시린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난로 곁에 앉은 평온함이 이럴까. 얼음판 위에 선 위태로움 뒤에 찾아온 따사로운 봄이 이럴까.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끓여주셨던 차 맛을 잊을 수 없어요.”
어릴 적? 어릴 적이라…… 참으로 오래된 기억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들이 선율을 타고 한 장 한 장 지나간다.
 

▲ 성인식 때의 김익진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라!”
『논어』의 첫 대목을 읽었다. 근엄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게 무슨 뜻이냐?”
“배우고 그걸 때때로 익히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맞았다는 표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뜻을 뚜렷하고 굳건하게 세운 뒤에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하느니라. 신학문을 배우기 이전에 동양 사천 년의 역사와 동양 종교가의 학설을 아울러야 해. 그때 스스로 깨닫고 일어서게 될 거야.”
목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내게 어려운 말이었다. 명심보감을 배울 때 들었던 ‘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가 떠올랐다. 우리 것을 널리 배우고 뜻을 도탑게 해야 한다는 말로 짐작했다. 무릎 꿇고 앉은 다리가 저릴 때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벼슬살이한, 빈틈없는 관리의 모습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김병욱은 안동 김씨로 문경 출신이었다. 느지막이 충청북도 연풍 현감을 지냈지만, 비판적이고 꼿꼿한 성품으로 인해 자주 무고를 받았다. 개항기에 척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펼쳤던 열린 지식인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 등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실사구시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관운이 따르지 않아 그 주장은 묻히고 말았다.
나의 아버지 김성규 역시 실학을 바탕으로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유교의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문을 배운 뒤 광무국 주사로 벼슬길에 나갔다. 이어 동학란 때 전라감영 총서로 난국을 수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고창 군수, 장성 군수를 지낸 뒤 광무개혁 때 전라남도 양무감리로 농업 개혁의 선두에 섰다. 그 뒤 강원도 순찰사로 나갔지만, 탐관오리인 홍천 군수를 봉고파직한 일로 모함을 받았다. 후일 정2품 벼슬을 사양한 아버지는 목포와 장성에 학교와 회사를 설립하고,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목포에 살게 됐다. 나는 한 해 곡식 2만 석, 녹두 8백 석을 추수하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책장을 덮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뒤꿈치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목을 빼고 나를 기다리는 벗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일까지 ‘학이(學而)’ 편을 외우라는 지엄한 명은 이미 한 쪽 귀로 흘린 뒤였다.
마구간에 들어섰다. 벗은 나를 보자마자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방금 배운 글귀가 실감 났다.
“햐! 이게 바로 산 공부잖아.”
궤변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스스로 흡족해했다.
‘히히이잉! 푸우.’
벗의 반지르르한 몸을 쓰다듬자 반가운 시늉을 했다. 고삐를 잡고 집 밖으로 나섰다. ‘이랴!’ 소리와 함께 채찍으로 엉덩이를 내려쳤다. 박차로 옆구리를 툭 쳤다. 내 속내를 알았다는 듯 녀석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드넓은 벌판을 달리는 말과 하나가 된 기분이 그만이었다. 아버지가 늘 읊조리던 물아일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옛 선비들이 자연과 하나 되어 성인들을 본받으려 했던 기분을 생생하게 느꼈다. 비록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와 같은 분들을 만나는 느낌은 안 들었지만…….
그보다는 훈장을 단 제복에 깃털이 달린 금테 모자를 쓰고 목이 긴 장화를 신은 군인이 되고 싶었다. 긴 칼을 비껴찬 멋진 군인 말이다.
‘말고삐를 양손에 쥐고 늠름하게 개선하는 김익진 장군!’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입에서 연신 웃음이 배어 나왔다.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그런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홉 살 터울인 큰형 우진은 구마모도 농업학교에 다니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형의 빈 공부방에는 신기한 것들로 빼곡했다. 퀴퀴한 책 냄새가 나는 아버지의 방과는 사뭇 달랐다. 그중에서도 알록달록한 그림책과 미술책들이 어린 나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큰형은 그런 나를 신비한 예술의 세계로 인도하곤 했다.
“이게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피에타상이야.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여인이 마리안데, 슬프면서도 애통해 하지 않는 표정이 일품이지. 우리 동양의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참 잘 표현했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큰형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듯도 했다. 대리석 조각이 마치 종이를 구겨 만든 것 같아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심오하고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그렇게 접했다.
그날도 말을 타고 산과 들을 쏘다니다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했다. 하인들이 이리저리 달리며 붕 떠 있었다. 큰형이 오랜만에 귀국했던 것이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큰형의 손길이 따뜻했다. 나는 언제 큰형처럼 훤칠하게 자랄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늘 부러웠다. 큰형이 귀여워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기분 나빴을 것이다. 장차 장군이 될 나를 꼬마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큰형만은 예외였다.  
“오늘도 말을 탄 모양이구나. 익진이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군인이 되기로 했어요. 우리나라를 지키는 멋진 군인요.”
큰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어진 무심한 말이 청천벽력과 같았다.
“군인? 일본 사람이 아니면 군인이 될 수 없는데…….”
내 가슴 속의 아름다운 꽃밭에 승냥이가 뛰어들어온 느낌이었다. 온실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소중히 가꾸던 꽃들이 무참히 꺾인 기분이었다.
“네? 차, 참말로 우리 조선 사람은 군인이 될 수 없어요?”
되돌아온 큰형의 말이 어린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우리는 지킬 나라가 없잖아. 그런데 군인이 왜 필요해?”
잔칫날 판소리로 듣던 심 봉사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우린 왜 나라가 없어요?”  



한국 평협평화신문 공동기획




김익진은 고뇌하는 지성인, 실천하는 신앙인의 전범(典範)이었다. 그는 물려받은 토지를 교회와 소작농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평신도로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삶을 20세기 한국 땅에서 재현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톨릭 영성과 관련된 주요한 책들을 번역하는 한편, 가톨릭의 토착화와 복음화와 관련한 주옥같은 글들을 써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세속화하고자 하는 유혹 앞에 선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큰 빛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익진의 표면적 업적보다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자 식민지 치하 지식인으로서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가톨릭 신앙으로 인한 삶의 변화와 복음적 삶의 실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삶을 통해 500만 명이 넘는 오늘날 이 땅의 가톨릭 평신도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이에 따라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며, 독자의 감정에 호소력과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유용한 ‘소설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여야 할 바를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깨닫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평화신문/2014. 11. 23발행 [1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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