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
사랑이 없다면
가정은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이 없다면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가정공동체 1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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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1-18 (수) 14:44
ㆍ조회: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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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생명에서 생명의 복음 ”


[교황바오로 6세의 회칙「Humanae Vitae」에서, 교황 바오로 2세의 회칙「Evangelium Vitae」에 이르기까지]

                                                                정 홍 규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목국 사회사목담당)

들어가며

 세기말 1999년, 새로운 1000년, 새로운 대림절, 새로운 세기, 이른바 3000년을 앞 둔 지금, 19세기말 유럽을 뒤덮었던 데카당스처럼 혼돈과 혼돈, 허무주의와 폭력ㆍ우울ㆍ향락ㆍ천민 자본주의ㆍ영원을 순간에 던져 버리는 정체성의 상실과 가치관혼돈이 우리 사회에도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회 전반의 규칙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불확실성과 불안 속에 생태학적 위기가 겹치면서 현대인들은 기댈 곳이 없어 보인다. 사이버 종교, UFO 신드롬, 우주열풍, 점성술, 명상 붐, 외계와 가상세계, 이상한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반면에 성도덕의 붕괴, 가족의 해체, 성폭력, 어디를 가나 얘기되는 서갑숙 성담론, 동성애, 콘돔카페, 레즈비언 카페, 이혼의 급증, 10대에서 주부에까지 이루어지는 매춘행렬, 사치와 낭비, 검은 색과 흰색의 유행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합리와 이성이 해체되면서 튀어나온 감성과 본능만이 난무한 결과이다. 특히 우주복과 잠수복, 군화의 등장은 불안한 현대인의 심리를  패션으로 표출하고 있다. 죽음의 문화,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기호이다. 이것은 단순히 세기말의 한 현상이 아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도덕적 상대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주관주의의 예정된 결과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긍정도 부정도 없이 모두가 제 멋대로 인 것은 옳고 그름의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성담론의 문제도 성이 출산의 족쇄에서 그리고 성이 사랑의 의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생명의 바탕을 이루는 성에 대해 지금까지의 고정관념, 편견, 선입관, 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렌즈를 끼고 살펴 보는 것이며, 성윤리의 잣대를 가정공동체에 두는 해석이 요청된다.

1. 죽음의 문화에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神이 죽었다고 단언하였지만 이제 그의 말은 문화적으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인간이 神을 죽였고 신 없이도 인간은 살 수 있다.

 20세기에 인간은 신이 죽은 결과가 바로 인간 자신의 죽음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자살이 시작되었다.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걸프전, 르완다 내전, 보스니아 내전, 집단학살, 민족말살 등으로 사망자 수는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로 죽은 모든 사람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많다. 문제는 무력충돌이 있는 전쟁터만이 인간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장소는 아니다. 사실 지난 30년간 전통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진 곳, 즉 가정, 병원, 의학 실험실, 요양소 등에서 전쟁터에서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낙태와 유아살해, 안락사, 우생학, 유전공학, 앤드류 킴벨이 말하는 인간 몸시장(human body shop)까지 포함해서 특히 태아 성감별로 매년 수백만의 인간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죽음 문화를 한마디로 "하느님 의식이 실종된 때, 인간 의식, 그 존엄성과 생명의 의식이 사라지는 경향도 생겨나게 됩니다."(생명의 복음 21항)라고 진단한다.

 우리 교회는 가정의 복음화를 위한 그 동안의 사목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참으로 생명의 성역임을 드러내지 못했다. 여전히 태아성감별에 의한 여아낙태가 행하여지고 있는 대구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 가정은 가정교회로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경축하며,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낙태, 피임, 불임시술, 화학약품, 자궁 내 피임기구, 기형아들, 중증장애인들, 노인들 심지어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큰 부담을 피하자는 실용주의적 동기에서, 그리고 성의 문제에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쾌락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심지어 출산을 자기 성취의 방해물로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자유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과 사회에 가득한 죽음의 그림자를 살펴보자. 먼저 지금 우리의 가정은 어떠한가? 소득수준의 향상은 여러 가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생활양식 뿐 만이 아니다. 가정생활과 결혼생활에도 변화를 수반한다. 산업사회로부터 시작된 핵가족화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변형을 거듭한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 된다. 독신주의가 늘고 계약결혼이 성행한다. 가족화(家族化: 가족이 더불어 함께 하는 기초공동체)가 아니라 개족화(個族化: 가족이 따로 따로인 탓에 생겨나는 가정해체 현상)가 일어난다. 평일에는 각기 생활하고 주말에만 모이는 둑스족(DEWKS : Double Employed With Kids)이 출현하는가 하면 결혼생활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해 버리는 딩크족(Dinks: Double Income No Kids), 그리고 벌어 놓은 재산으로 독립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를 희망하는 노년세대, 우피족(Woopies: Well-off Older People)도 생겨난다.

 이뿐 아니다. 우리 가정의 소비성향은 어떠한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는 곧 소비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저축이 미덕이고 장려사항이기보다는 소비가 미덕이요 희망사항이 되어 버린 시대이다. 그래서 소비억제를 동원했던 생산, 성장, 효율, 금욕주의가 사라지는 대신 소비, 개성, 가치, 문화, 탐욕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우리시대의 모습이다. 결혼 생활도 예외 없이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연간 수 조원에 해당하는 혼수비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쾌락을 채워 주는 섹스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제 3천년기의 비전대로 내년부터 시작되는 희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천년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기말 현상에서 집착할 것이 아니다. 성찰과 반성, 제도적, 교육적 쇄신이 요청된다. 그리고 한 가지는 20세기 말 대도시, 거대국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로부터 서서히 탈출하려는 움직임은 적극적인 반성의 표현인지 모른다. 거대담론에서 미시담론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의 기초공동체운동, 환경운동, 생명운동, 사형폐지운동, 비영리조직, 제3섹터, 시민운동, 자원봉사운동으로 펴지는 시민사회의 탈국가화 움직임은 희망의 연대들이다.

 모든 사회의 기초단위이면서 문화 변혁의 주체인 소공동체인 가정 공동체를 생명의 성역으로 선포하는 것은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는 시대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먼저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히 제시하고자 한다.

2.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 그 이후

 지금부터 28년 전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올바른 산아조절에 관한 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을 발표했다. 바오로 6세는 인간 생명을 출간하고 일주일 후에 "우리가 이 경우만큼 사명감의 무게를 느낀 적은 없습니다." 라고 털어놓았다.

 딜레마로 인해, 여론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로 인해, 현 사회가 제 길을 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 그리고 그런 제멋 대로인 사회가 혼인생활에 힘겨우리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까? 인간 생명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는가? 과연 산아조절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변했는가? 수많은 종류의 자궁 내 삽입장치들, 작은 경구 피임약, 나팔관과 수정관 봉합수술을 교회가 장려하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밖으로부터 비난과 안으로부터의 반대와 침묵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995)에서 교도권으로 엄숙하게 재선언 하였다.

 가족계획 단체의 창시자 마가렛 싱어가 1912년에 "산아제한"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썼을 때 교황 비오 11세는 그의 획기적 회칙 정결과 혼인(Casti connubii 1931)을 발표했는데, 자연법에 근거한 이 회칙은 피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재확인하고 혼인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 후 비오 12세, 요한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1968년 인간 생명을 거듭거듭 역설하며 피임에 대한 가르침으로 비도덕적 성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지난 60년대를 시작으로 19080년에 이르기까지 성혁명이 서방세계에서 초고속으로 달려오면서 한 세대는 출산거부, 간음과 이혼, 변태를 흔하게 여기며 자라왔다. 이제 세기말의 한국도 서서히 그 전철을 밟고 있다. 성윤리가 무너지면서 점차적으로 가족제도가 붕괴되고 혼인제도 역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인간 생명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보자. 먼저 성은 90년대 들어 대체 이데올로기 부상할 만큼 강력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다. 최근 신세대의 성 풍속도에 대해 '성의 폭력', '범람하는 섹스이미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자연스러운 성욕'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 나라는 미국, 스웨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성폭력 발생률이 높은 나라로 국제형사기구의 1992년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성범죄가 양산되는 현실은 가정, 학교에서는 금기주의, 사회에서는 방종할 여건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성문화풍토 여성이 눈요깃감, 노리개 감으로 표현되는 남성주의적인 성의 상품화, 성윤리 교육의 부재현상 소외감, 좌절감을 부추기는 교육제도의 모순 등을 지적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년 9월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 여성대회에서조차도 성폭력과 인권 -특히 여성과 여아어린이 피해에 대해 특별조치를 각국정부에서 시행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이러한 세기말 가정해체와 인간 생명 파괴현상에 대해 교황은 1980년 주교회의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선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얻는 중요한 결과는 회칙 '가정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1981)'였다. 가정공동체는 피임을 광범위한 맥락에서 다루었다. 이른바 대안적인 가족, -동성애 부부, 인공수정 가족, 정략혼인-이 있을 수 있음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 생명이후 사목자 들도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교회의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서, 그리고 복음과 문화의 괴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타협, 침묵, 방관, 애매모호, 회피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회칙 인간 생명 이후 현재 1년에 3억 정도가 낙태를 하며, 폭넓은 통계를 보면 전세계 가임기에 있는 8억 8천 부부 중 약 3억 4천에 달하는 부부들이 피임과 불임수술을 받고 있다. 이는 40%에 달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회 현상을 살펴보면 1960년에 히피문화와 인공 피임약, 1970년대 폭력과 낙태, 그리고 IUD(Intra Uterne Device 자궁내 피임장치), 1980년대 마약중독과 안락사, 시험관 아기, 1990년대 불치의 에이즈, 콘돔문화, 동성연애가 문제되기 시작하였다. 이 뿐 아니다. 최근에는 아시아 어린이 1 백만 명이 매춘업으로, 그리고 태국에만 무려 80만 명의 매춘 아동이 있고 그 연령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 역설적인 관계를 가지라고 강조한다. 동성연애자들이 ADIS에 걸릴 확률이 가장 높은 집단임에도 그들을 정상인으로 인정하라는 활발한 로비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출산율이 떨어지는데 제 3세계는 출산이 늘어난다. 문제는 선진국에서는 낙태 합법화(클린턴)와 다양한 피임기술로 제 3세계의 출산율을 통제하려는 음모가 카이로 회담에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1994년 카이로 인구회의에서 우생학, 인구조절, 여권운동의 새로운 논리로 피임, 불임, 낙태를 합법화하려고 했던 노력은 확고부동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연대한 제 3세계 나라들로 이루어진 일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낙태반대운동단체의 경우 년간 150만건에서 200만건을 추산하고 있는 반면, 정부기관(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1/100인 2만 5천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우리사회의 반인간생명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이른바 대표되는 것이 '남초현상이다.' 우리나라 출생성비는 1994년 현재 115.4(출생 여자 1백명당 남자수)로 같은 유교권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중국, 대만 등을 앞질러 세계 최고 수준이다. 80년 104.3이었던 성비는 86년 111.8, 90년 116.8 92년 113.8 등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연적인 정상 출산비(100:106)를 벗어난 남초현상은 남아선호관과 성감별에 의한 아들 출산, 즉 여아낙태의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95년 8월 서울 여의도 S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15명, 이들 신생아의 성은 100% 남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 뿐 아니다. 1991년의 경우 첫째 아이의 성비는 106이지만, 둘째는 113, 셋째는185, 넷째는 무려 212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곧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아선호사상과 생명불감증을 강화하고 출생성비를 증가시키는 기제(mechanism)가 바로 사회적으로 엄존하는 성차별적 관행과 의식임을 증명한다.

 성비파괴는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 신부감 부족으로 인한 수입신부 이야기, 성범죄와 인신매매, 동성애와 에이즈 등은 대재앙의 불길한 전조를 알린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역사상 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성비가 매우 불균형한 상태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13세기 십자군 전쟁, 18세기 유럽의 30년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때 남자 인구가 여자 인구보다 압도적으로 앞섰다는 사례연구를 들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신자들은 어떤가? 우리 신자들 또한 예외 없이 태아 성감별에 의한 낙태에서부터 갖가지 인공피임을 하고 있음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적어도 성에 관한 한 신자이든 아니든 어느 종파이든 지간에 그 성혁명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대구 교구 평신도 7천 7백 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신자의식 설문의 평신도 교육에 관한 안건 중 "자연피임법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각 본당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물음에 대해 응답자의 37.8%(2,912명)만 찬성하고 62.2%(4,796명)는 반대입장 내지는 무응답을 보였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분명하게 반대의 가르침을 전하는 인공피임에 대부분의 일반신자들이 아주 익숙해있음과 자연가족계획(NFP)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이미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 인간 생명 17항에서 불신과 윤리 생활의 퇴폐가 산아조절의 인공적 방법의 결과임을 설명한다. 현대는 새로운 세기 200년을 앞두고 새로 찾은 행복의 시대, 이른바 천문학에서 말하는 물고기좌에서 물병좌로의 우주 이동의 전조를 알리고 있다. 신세대의 세기말적 개인주의, 검은 패션, 에로티시즘, 감각주의, 쾌락주의, 육체주의 컬트는 도대체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과연 우리들은 성혁명으로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성능이 좋은 콘돔과 페미돔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낙태는 늘어만 간다. 미국인들은 매년 백만 6천 명의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기꺼이 죽이고 있다. 이는 한 달에 133,385명, 하루에 4,445명, 한시간에 185명, 일 분에 4명, 일 초 1명의 아이가 낙태를 당하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애들에게 피임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전에 카톨릭 교회가, 피임이 도덕적으로 불법이라고 고지식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낙태를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낙태나 불임시술과 피임은 교회가 금지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기에 교회는 금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생명의 복음" 13항에서 이 점에 대해서 불명하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음에 찾아올 낙태의 유혹을 배제하겠다는 생각으로 피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임 사고방식"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가치들은, 원하지 않는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는 그 유혹을 강화시키는 것들에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임 사고방식"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가치들은, 원하지 않는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는 그 유혹을 강화시키는 것들이 책임 있는 부모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피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곳에서 낙태 조장 문화가 특별히 위세를 떨칩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피임과 낙태는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악입니다. 즉 전자가 부부애의 정당한 표현인 성행위의 충만한 진실을 훼손하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저자가 혼인의 순결과 대립되는 반면에, 후자는 정의라는 덕목에 대립되며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입니다.

3. 자연법

 전 세계적으로 90년대는 한층 해로운 도덕적 일탈현상들이 만연되었고, 선례 없는 비도덕성과 사상적 합리화가 고조를 이루었다. 이것은 성도덕 혹은 가정도덕 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 마약중독, 사회적 억압, 공공비리 등의 다른 분야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옳음과 그릇됨이 존재하는가? 도덕성은 실현불가능한 꿈인가?

 이러한 문제와 질문들은 바로 1993년 교황 회칙 '진리의 광채'가 나오면서 교회가 답을 하려고 애를 쓰던 물음들이다. 진리의 광채는 피임, 가정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덕성 자체에 관한 글이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가 긴급히 답을 구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는 피임이 던진 돌이 어떻게 연쇄작용을 일으켰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혁명의 방향을 뒤집기 위해서는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진리의 광채가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윤리의 문제는 사적인 문제이거나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문화나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윤리적 상대주의가 지금 유행처럼 흐르고 있다.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권리로 장려하는 운동이 바로 잘못된 도덕기반을 사용하는 예이다.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을 부정하는 일은 "정당하고 평화로운  인간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임을 알 수 있다(96항).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 없이는 힘은 정당한 것이 아니며 가장 약한 이가 가장 많이 상처를 받을 것이다.

 교회는 자연법의 교리에서 참된 도덕적 기반을 제시한다. 이 점이 참 중요하다. 교회가 생각하는 권리는 인간의 본성(자연법)과 창조된 우주의 전 질서에 바탕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하고 그 범위에 있어 보편적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토마토는 어둠 속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법은 광합성이 일어나기 위해 빛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질서가 추락하는 이유는 어두운 방에 옮겨 심겨진 식물처럼 우리 문화가 자연법을 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 "만약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수태되는 순간에 그 사람의 생명의 권리가 침해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침해될 수 없는 선을 보장하는 윤리질서 전반에 일격을 가하게 된다. 이런 선(善) 중에는 생명이 첫째이다." 자궁에서부터 무덤까지 우리의 생명이 존중되고 보호받지 못한다면 어떤 권리와 자유도 누릴 수 없다. 생명은 근본적인 실재이다. 종교가 다를 지라도 우리는 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수호해야 한다. 서구 문명사회는 이 자연법 위에서 건설되었다. 그러나 현대 문화는 이 자연법을 거절한다. 현대는 비자연의 방식이다. 하느님이 섭리한 이 인간의 본성에 등을 돌리면 우리는 사실상 법, 인권, 그리고 모든 사회질서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제국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데 대해 경고했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법이다. 자연법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는 모든 사물의 본질에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정자 숫자의 감소, 늘어나는 고환암, 유방암, 성기의 왜소화 등은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유기염소 물질의 농도가 높아진 것과 관련이 있다. 동성애는 자연의 방식이 아니다. 남성의 신체는 여성의 신체 작용을 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다. 레즈비언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기에 자연의 방식이 아니다. 낙태 역시 피임 역시 자연의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궁을 강탈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연 주기법도 어느 한 종파, 어느 한 부족, 어느 한 시대의 방법이 아닌 모든 이의 자연법이다. 교회가 모든 인공피임을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연법의 또 한가지는 행복한 결말을 우리는 갈망하고 모순과 부정의의 추구를 혐오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미지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우리의 영혼에 정의를 느낀다.

 우리 중에 가장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람만이 성폭력과 매춘, 성을 상품화한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카톨릭이든 아니든 인간의 영혼은 정의를 추구한다. 자연법은 창조주의 선물이다. 신자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사목자가 가르치든 그렇지 않든 모든 피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물론 회칙 진리의 광채가 피임이 항상 죄악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기록은 아니다. 66년 전 비오 11세는 그것을 분명히 말한 바 있다. 그 이후의 많은 교황들도 그와 같이 말했다. 다음에 나오는 교황의 문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 있다.

 비오 11세: 피임은 엄중한 죄악이다.

 성교 행위 동안이나 태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고유의 힘을 빼앗거나 새로운 생명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어떤 행위도 비도덕적이다. 어떠한 "지식"이나 필요도 그런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인 행위를 도덕적이고 합법적으로 바꿀 수 없다…

 비오 12세: 피임은 불변의 죄악이다.

 이(정결과 혼인) 명령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신의 법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23세: 모든 사람은 이 법을 지켜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 천천히 그리고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이므로 이의 실천은 가장 신성하고 불변하는 하느님의 변함없는 지시에 조화를 이루며 행해져야 한다. 예외 없이 모든 이는 이 법을 인식하고 따라야 한다.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을 살펴보는데 사용되는 방법을 어떤 사람도 인간 생명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교황 바오로 6세: 모든 피임을 부정하라.

 그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든 아니면 목적 그 자체로 선택되었든 생명을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거부해야 한다. 여기에는 성행위나 성행위에 수반되는 행위나 성행위의 결과로 따르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교회의 완전한 가르침을 교육하라.

 우리의 특별한 지지는 그리스도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완전한 가르침을 주고, 이들에게 그리스도 가정의 고결한 이상을 불어넣어 주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임은 언제나 엄중한 불법 행위이다.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과 일관되어 회칙 인간 생명에서 2차 바티칸 위원회와 나의 선임자 바오로 6세의 교도권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언적인 선언서를 물려주었으며, 이는 결혼과 생명의 전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과 기준을 분명하게, 그리고 오래 되었으나 항상 새롭게 밝혀주고 제시해 주고 있다.

 이를 위해 시노드 신부들은 최근에 열린 회의에서 아래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신성한 시노드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베드로의 후예로 함께 모여서 2차 바티칸 회의와 이후의 회칙 인간 생명에서 발표한 것 특히,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은 완전히 인간적이며 독점적이며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피임을 통해 결혼한 부부들이 성생활에서 그 고유의 생산능력을 배제하려고 할 때 그들은 완전히 하느님께 속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출생하는 아이의 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능력, 그들은 그 자격이 하느님의 창조력 내에서 조력자로서의 것이 아닌, 인간 생명의 근원을 궁극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피임은 어떤 정당화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객관적으로도 대단히 불법적인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그 반대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가정공동체 11항

 그 결과로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국한된 정당한 행동을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성(性)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됩니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입니다. 만일 현세적 자원을 포함해서 전 인간이 걸려 있는 완전한 자기 증여의 징표와 결실이 아니라면, 만일 인간이 완전히 바쳐지지 않는 행동을 통해서 어떤 것을 보류하거나 미래에 달리 결정할 가능성을 유보하는 경우라면, 온몸을 내어 준다는 것은 한갖 거짓에 불과합니다.

 가정공동체 32항

 자연적 주기의 선택은 인간, 즉 여자의 주기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대화, 상호 존중, 책임의 나눔과 자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기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것은 부부 일체의 영신적 육체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고 충실의 요구대로 인격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부는 부부일치가 육체적 차원을 포함한 인간적 성의 내적 요체를 이루는 부드러움과 애정의 가치로써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이 참되고 완전한 인간의 차원에서 존중되고 촉진되며, 결코 "대상"으로서 "이용"되지도 않을 것이고, 인간은 자연과 인간의 가장 깊은 상호 행위의 지평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침해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인격적 일치를 파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리의 광채 48항

 육체를 포함한 전인격체는 인간에게 맡겨져 있으며 인간이 그 윤리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안에서입니다. 인격체는 이성의 빛과 덕의 지원을 받아 창조주의 지혜로운 계획과 조화를 이루어 육체 안에서 선참적인 표정들을, 자기를 내주는 행위의 표현과 약속을 발견합니다.

 카톨릭 교회교리서 1664항

 단일성과 불가해소성과 출산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혼인에 필수적이다. 일부다처제는 혼인의 단일성과 양립할 수 없고, 이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가르는 것이며, 출산 거부는 하느님께서 부부생활에 주시는 자녀라는 "가장 중요한 선물"을 외면하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교리서 1666항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자녀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배우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가정교회", 은총과 기도의 공동체, 그리고 인간적인 덕행과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학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카톨릭 교회교리서 2270항

 인간의 생명은 잉태(受精)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인간의 권리들을 인정받아야 되며, 그 중에는 모든 무죄한 이들의 생명 불가침의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신앙교리성, 훈령 '생명의 선물', 제1부, 1참조).

 카톨릭 교회교리서 2271항

 교회는 1세기부터 모든 인위적 낙태를 도덕적인 악으로 단정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변하지 않았으며 불변하는 것으로 존속한다. 직접적 낙태, 곧 목적이나 수단으로 원한 낙태는 도덕률의 중대한 위반이다.

낙태로 태아를 죽이지 말고, 갓난 아이를 죽이지도 마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 유지라는 숭고한 임무를 인간에게 맡기시어 인간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방법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잉태(受精)되는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해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가증할 죄악이다(사목헌장 51장 §3).

 카톨릭 교회교리서 2274항

 태아는 잉태(受精)되는 순간부터 인간 대우를 받아야 하므로, 가능한대로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산전진단(産前診斷)은 "태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지키고 태아를 하나의 개체로서 보호하거나 치료할 목적으로 행해진다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진단 결과에 따라서는 유산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도덕을 심히 거스르는 것이 된다. 진단이란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생명의 선물', 제1부 2항)

 카톨릭 교회교리서 2370항

 주기적인 절제, 곧 자기관찰과 불임기간의 이용('인간생명', 16항)에 바탕을 둔 출산조절(가족계획)은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합치되는 것이다. 이 방법들은 부부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들 사이의 애정을 북돋으며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준다. 반면에 "부부행위를 앞두고, 또는 행위도중에, 또는 그 자연적인 결과의 진행 과정 중에, 출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수단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악이다."('인간생명', 14항)

 카톨릭 교회교리서 2398항

 자녀 출산은 혼인의 선익이요, 선물이며, 목적이다. 생명을 탄생시킴으로써 부부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참여한다.

 카톨릭 교회교리서 2399항

 출산조절(가족계획)은 책임이 있는 부성과 모성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하나를 표현한다. 부부의 정당한 목적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예컨대 직접적인 불임 수술이나 피임)의 이용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무릇 생명이란 기본적 가치이며, 부부는 이러한 생명의 선물을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책임을 바탕으로 서로 자유롭게 협력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에 참여토록 부름받는 것이다(창세 1, 28).
 그러나 교회는 가정에 대해 어떤 규범도 부여하지 않는다. 수많은 가정을 찬양하지만, 이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수많은 가정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내지 사회학적 여러 가지 어려움 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서로 비슷하게 겪고 있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육체적 내지 심리적 난관도 모르고 있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양실조 및 기아문제와 관련된 인구조절, 식량위기 속의 60억 인류의 어려움도 물론 알고 있지만, 그러나 "자녀수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부부의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시키려는" 정부나 국가를 교회는 단호하게 단죄한다(인간 공동체 30항). 왜냐하면 출산은 기본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를 지키고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격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굳게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임신은 하나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혼인에 의해서 그리고 혼인을 통해서 부부에게 약속된 봉사이기도 하다. 피임의 문제나 출산조절에 대한 교회의 입장도 오직 이와 같은 원칙에 비추어 검토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출산조절이 임신과 상반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부부의 임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임신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코 고려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산아제한을 위해 사용되는 방법들이 아무리 좋거나, 심지어 심각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직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로서 성행위는 의미를 존중하는 부부의 존엄성에 객관적으로 일치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교회는 자연법의 이름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로마 2, 9-10. 로마1, 28-29. 로마 7, 22).

4. 인간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1) 회칙 "인간 생명"에 참여하자.

 지금 인간 생명을 반대하는 11 나라는 캐나다, 스위스, 영국, 독인, 벨기에,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다. 참 이상한 것은 이 나라들은 출산율이 떨어지고 안락사는 늘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유럽에는 아이들이 탄생하지 않아서 교회도 텅텅 비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도 텅 비어있다는 사실, 벨기에의 경우는 카톨릭 학교에서 코란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경험하고 있다.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회칙이 발표되었을 때 유럽에 냉담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러나 지금 그 나라는 어떤가? 사할린에 다녀온 신부님들이 한결같이 체험한 것은 높은 이혼율과 가정부재 현상이었다. 혁명을 서둘렀던 무신론적 마르크스의 노력 가운데 중요한 일부는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것이었음이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 정권의 문서창고가 열릴 때마다 매일매일 확인되고 있다. 그런 노력의 일부는 성도덕을 낮춤으로써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가 사목자 개인의 의견을 다르더라도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의 문화가 보편화되었다고 보면 지나친 말일까? 낙태는 절대 안되지만 피임에 대해서는 부부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것, 즉 침묵하는 것, 허용하는 것, 알아서 하는 것으로 덮어 버리거나 타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현 교황님의 회칙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신학자들이 이야기하지만 누구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교도권으로 표현된 '생명의 복음'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더 큰 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보다 작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더 큰 죄, 이를테면 ADIS 예방의 목적으로 그리고 낙태를 막을 목적으로 보다 작은 죄 즉 여러 가지 피임과 콘돔을 윤리적으로 허용하자는 신학자의 의견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죄악은 죄악이라고. 또 한가지 모순은 콘돔 사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ADIS 이외의 성병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교구의 센보른 대주교님의 말씀을 인용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고, 사람의 팔을 절단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확실히 작은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팔을 절단해도 좋을까요? 자신의 배우자를 ADIS 에 감염시키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보다 작은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도 죄악은 죄악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경우라도 콘돔 사용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찌 통치하에 가치없는 생명을 죽이는 수단으로 안락사가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인되었다. 그런 살인 센터들은 자원 경제를 갉아먹으면서 사회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 무가치한 소모품들을 사회로부터 정화시키면서 쉴새없이 일했다. 이런 잔악한 행위를 회상하면서, 그 당시 노렘베르그의 전범 상담소의 임원으로 재직했던 보스톤의 정신의 레오 알렉산더 박사는 충격적인 그러나 정확한 비평을 했다.

 이런(독일 전쟁의) 범죄가 어느 정도이든 간에, 그것을 조사했던 우리들로서는 그들이 사소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단지 의사들의 기본 자세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있다'는 안락사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이런 태도는 단지 심하게 혹은 만성적으로 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으나 점차 사회적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람, 이념적으로 버림받은 사람, 인종적으로 배척받은 사람, 그리고 마침내는 독일인이 아닌 모든 사람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전체적인 구상이 추진력을 얻게 된 이 사소한 동기는 바로 회복 불가능한 병자에 대한 태도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달은 일이다.

 원하지 않는 아이는 낙태해도 좋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죽음 문화, 그것이 낙태든 피임이든 무엇이든 간에 모든 부패는 너무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3) 실패의 기록에서 배우라.

 매년 미국 십대소녀 10 명당 한 명 꼴로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학교에서 분명한 성교육 프로그램과 학교 부설 클리닉의 형태로 지난 수 십 년간 가르쳐 왔으며 지금도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의 증가에 발맞추어, 혼전 성행위와 임신은 증가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국 정부의 가족계획 기관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점들은 그들이 행한 성교육 프로그램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피임에 관한 교육에 의해 14세 중학생이 성관계를 시작할 확률이 50% 증가되었다고 그런 논문 중 한 편이 밝혔다. 미국은 1978 년에 청소년 임신에 관한 법률 이후에 피임시술에  들어가는 정부와 주의 비용은 1986년 3.5억 달러에서 1992년에는 6.45억 달러로 증가했다. 공립학교에서 성교육이 강화되면서부터 그리고 피임법 사용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정부는 연방 가족계획의 예산을 1억 달러 증액했다고 한다. 성교육의 효과가 없다는 결론과 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더 이른 나이에 성행위를 시작한다고 밝혀졌다. 우리들도 여기저기에서 이런 방식에서 접근하는데 이것은 꼭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문제는 안전한 성관계가 아니라 올바른 성관계이다. 다음의 경우를 꼭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례 1) 가족계획전망(Family Planning Perspective) 1996. 6월호에서 보고한 바로는 '저항기술' -No 라고 말하는 방법- 을 배운 학생들은 산아제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보다 성적 행동에 관계하는 경우가 훨씬 적었으며 성(Gender) 파트너의 숫자도 적었다. 애틀랜타의 공립학교에서 절제를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은, 전통적인 성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전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들보다 그 해동안 성행위 빈도가 15배가 적은 경향을 나타냈다.

  두 개의 다른 유명한 프로그램 Sex-Respect 와 Teen-Aid 는 연구와 교육을 위한 협회의 연구결과에 따라 십대 성행위를 감소시키기 위해 혼전 성행위가 가지는 질병의 위험뿐만 아니라 정서적 위험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Sex-Respect 코스에 등록했던 일리노이주 학생들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프로그램에 등록하기 전에는 60%의 학생들이 절제가 임신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데 동의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는 80%의 학생들이 절제를 찬성했다. 그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성적으로 적극적인 16세 이하의 소녀 1,000명에 대한 1990년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은 주제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84%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No라고 말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1993년 3월에 간행된 뉴욕 타임즈에서는 10살 정도밖에 안 된 수 백명의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고소된 캘리포니아 갱의 일원이 인터뷰한 것을 특집으로 다뤘다. 그 소년은 너무나 솔직했다. "그들은 콘돔을 나눠주고 성교육과 임신에 관한 이것저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규칙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례 2) 최근 미국의 질병통제센터(CDC)와 전국 모자건강보호연맹(NARAL)의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고 에이즈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성교육 프로그램을 가진 주의 10대 임신율이 성교육 프로그램 대신 금욕과 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주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주의 법률이나 행정명령에 의하여 성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 조지아,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워싱턴 DC의 경우 1992년 기준 15-19세 학생 1천명 중 1 백명 이상이 임신을 경험해 10대 임신율이 10-11%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의무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은 없고 주로 금욕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와이오밍, 노스타코마, 유타주의 10대 임신율은 5-5.6%로 훨씬 낮게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신세대들에게 막연한 성교육과 성정보 노출보다는 금욕을 일깨워 주는 것이 미혼여성의 임신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순결서약식과 같은 행사는 좋은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순결서약은 성윤리를 개개인에게 맡기기보다는 가족이나 교회공동체 전체의 관심사가 되도록 한다는 맥락 하에서 금욕과 절제를 바탕으로 한 일정기간의 혼인 전 성윤리교육 후에 더불어 함께 공동체운동으로 순결서약을 정착한다는 것이다. 집단 앞에서의 서약은 개인의 책임을 강화시켜 주는 강력한 유인가(incentive)가 될 수 있다.

 4) NFP(Natural Family Plan) 배란법

 자연가족 계획법은 주로 가나강좌에서 다루거나 행복한 가정운동에서 가르친다. NFP 교육의 부재이다. 사실 NFP는 절제와 정결교육이다. 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자연적인 방법이 바로 NFP이다. 조제트 로이저 박사가 30년 이상 교육한 이 방법은 규칙을 정확히 따르기만 한다면 사이클의 후반 10일 정도는 100%, 그리고 첫 주에는 99%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피임약, 불임수술, IUD, 콘돔, 낙태 이런 것들은 세계 인구의 반이나 되는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약의 부작용도 심하다. 피임정, 호르몬에 의한 인공 피임, 불임 백신, 인공 임신조절, 월경조절, 월경을 인공적으로 일으키는 RU 486은 범죄이다. 이들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여성은 남성이 원할 때 남성을 기분좋게 하는 것으로써 언제나 남성에게 있어 입수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여성의 존엄을 빼앗겨 버린다. 여성을 감정을 가지지 않은 기계로서 취급된다.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기를 원하면, 스위치를 넣는 셈이다. 아이가 이제 필요하지 않게 되면 약품이라든지 기구라든지 수술에 의해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그녀들이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았을 때에는 그 아이는 죽게 된다. 이것은 여성에게 있어 큰 고통이 아니고 무엇일까. 별거나 이혼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공 피임약은 '안전한 모성(母性)'을 추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전한 모성'이 아니라 '안전한 거짓말'이야 말로 정말로 가깝다. 왜냐면, 남편들은 자신들에게는 조금도 위험없이 아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에 아내들은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안전한 모성은 남편이 이기주의를 버리고 아내를 사랑하며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 자신의 파트너로서 존경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시대는 변해 과학은 진보되었고, 여성은 이제 이런 위험한 방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현대 여성들은 자신들이 임신 가능한지 어떤지, 임신 가능의 징후인 점액(粘液)을 매일 밤 관찰하면 된다. 자연에 기초를 둔 가족계획(NFP)의 여러 가지 방법, 특히 배란법(排卵法)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맹인을 포함한 어떤 여성이라도, 배란 후 3일간을 포함한 임신 가능기간의 징후인 외음부의 그 미끈미끈한 감촉을 알 수 있다. 임신할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 임신까지 당분간 기다릴지는 부부가 몇 가지의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결정할 수 있다. 단 그것을 위해서는 부부의 확실한 결심이 필요하다. 자연에 기초를 둔 이 가족계획은 서로의 존경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존경, 부부의 인격적 성장을 촉구한다. 가족계획의 책임은 두 사람에 의해 분담된다. 이 방법은 가족구성원의 안전과 건강을 보증한다. 이 방법은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다. 이 방법을 모두 추진하자.

 5) Home schooling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은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의 정신적, 지적, 육체적 성장 단계에 맞추어 그의 자질과 관심사에 맞도록 최대한 폭넓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이 지향하는 바는 학문적 성공도, 창조적이고 지향적인 인격 형성도, 그리고 폭넓은 친근한 인간관계의 형성도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부모가 되는 그 순간부터, 바로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에게 수저를 바르게 잡게 하는 것, 이름을 바르게 쓰도록 가르치는 것, 인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등이 이미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도중에 우리는 이웃의 조언을 얻을 수도 있고(예를 들면 아기를 밤에 깊게 자도록 하는 것, 혹은 용변을 보게 훈련시키는 방법 등), 함께 어떤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녀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별 고려없이 또래들과 함께 학교에 보내고 그 때부터는 지금까지 해온 교육자의 역할을 전문적인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교사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그러나 학교에 다님으로서 더 악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떨까? 대부분의 경우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켰으나 나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아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을 고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목발을 집고 가는 친구를 보고 웃는 자녀를 보고, 그리고 자녀가 학교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콘돔 사용을 가르치고 심지어는 여학생들에게 부모의 동의도 없이 낙태 연습까지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모들은 소중한 자녀의 교육에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너무나 게을리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문적인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교사들의 자질도 생각해 보게 된다. 또한 획일적인 학교 교육에서 나의 자녀가 뒤쳐질 경우 교사가 내 자녀의 수준에 맞추어 교육을 해 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라면, 내 자녀가 흥미를 잃고 다른 장난거리에 관심을 쏟게 되지는 않을까? 등등…… 자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들이다. 부모들의 판단에 따라 자녀의 학습수준과 관심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조절할 수도,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언제부터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적어도 5년 정도는 해왔을)의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의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6)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현대생활에 있어서 잃어버린 고리란 부모와 아이들 사이의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최근에 신세대 부모들이 가족이 함께 지내야 할 시간을 다른 곳, 즉 학원, 무슨 소, 무슨 원, 무슨 집에 위탁하고 있다. 큰 문제이다. 가족의 잃어버린 고리란 부모와 자녀들이 보내는 대화시간의 부족이다. 미래의 가공생활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부모와 자녀들간의 의사소통 방법을 교육하는 곳이다. 사실상 부모도 자녀도 모두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훈련이 다 필요하다. T.A.(교류분석) 프로그램도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부모나 자녀가 시간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사시간이나 차를 같이 탈 때, 쇼핑할 때 자연스럽게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시간을 같이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7) 전체로서의 가정사목

 전체로서의 가정사목은 한 인간의 중요한 인간관계 조직인 가정을 "사회적 맥락"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목자의 사목활동을 계획하고, 평가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개인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목자들은 개개인에 초점을 두기는 하지만 막상 사목자들이 한 부분이기도 한 인간관계 조직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 예를 보면 자녀들을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 가정공동체는 가족 전체의 집합체도 아니고 단순히 가족의 식구들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가정 공동체를 가족구성원들의 상호작용, 곧 구체적인 관계이다. 사목자는 조직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족 구성원간에 대해서 복음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교육적, 구조적 수단은 효과적일 수 없다. 가정공동체에 초점을 두고 선교하는 것은 특히 청소년기에 중요하다.

 8) 통합 전략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교육에 관한 한 분리시켜 왔다. 가정과 학교, 가정과 주일학교, 장애인과 정상인, 아버지와 아들, 노인과 아이, 어머니와 딸, 여성과 남성을 서로 소외시키고 따로따로 교육시켰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의 경우 어린이 미사 따로, 중 고등학교 미사 따로, 성인 미사 따로, 특히 대축일이나 성가정 축일에도 마찬가지이다. 통합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교재도 마찬가지이다. 교재 안에 부모의 자리가 없다. 부모가 함께 하는 교재가 나와야 한다. 이제는 자녀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부모중심에서부터 시작되는 통합교육이 우리의 과제라고 본다.

 9) 페미니즘과 새로운 페미니즘(New feminism)

 최근에 모든 방송사들이 경쟁하듯이 보여주는 불륜은 여성운동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있다. 지난 날 오랜 역사기간동안 여성들의 위치는 억압되고 차별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흔히 문제가 있는 여성들의 반란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구조에서 다루어야 한다. 여성들만 탓해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 여성운동 혹은 여권주의를 병적인 평등성을 획득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출산거부, 낙태선택, 독신예찬, 마치 남성 우월의 표본들을 모방하려는 태도가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생명운동의 주체는 여성들이다.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도 여성들이다. 인간 생명의 새로운 문화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여성도 사고와 생명의 신비와의 특별한 친교를 통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위치도 독특하고도 결정적임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의 복음 99항에서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여권주의(new feminism) 촉진하는 일은 여성들에게 달렸다고 교황은 말한다.

 "모든 훌륭한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소리없는, 그러나 큰 힘을 지닌, 감동적인 신앙의 증거 역시 매일의 영웅적인 행위에 포함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어머니들, 자식을 낳기 위해 산고를 치르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것을 전해주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는 어머니들입니다." 자신들의 사명을 실천하는 "이 영웅적인 여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항상 그녀들을 지지해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조작되고 방송되는 문화적인 표본들은 모성애의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훌륭하게 증언했고, 계속 검증하고 있는 충실성, 정결, 희생 등의 가치들은 발전과 현대성의 미명 아래 쓸모 없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우리는 영웅적인 어머니들의 불굴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10) 성교육은 가정안에서

 최근의 연구조사들은 부모들이 자녀들과 자신의 성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함을 나타내준다. 한 연구에 따르면, 부모들이 성교육의 중요한 원천적 정보 제공자였을 때, 아이들은 혼전 성관계에 있어서 보다 더 전통적인 규범(순결에 관하여)을 따르는 경향이 있음이 밝혀졌다. 같은 연구는 또한 가정과 보다 더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는 자녀들이 성적으로 탈선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자녀들이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면 될수록 성적인 문제에 노출되기 쉽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들을 자신의 성적인 가치를 자녀들과 숨김없이 나누면 그들이 성행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의 사실로 밝혀졌다.

 이를테면 "주로 부모들이 제공하는 성에 대한 정보는 성교를 해보고 싶은 충동보다는 혼전 성행위를 억제하는데 보다 더 많이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효과적이기 위해서 성지식은 학교나 다른 출처에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부모에 의해서 제공되어야 함에 주목하라!" 가정에서 성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딸들이 아들보다 훨씬 더 잘 소화해 내며, 어머니들이 소년 소녀 모두에게 있어서 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첫 번째 출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이 문제에 있어서,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무관심한 것이 분명하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또한 가부장제도의 붕괴로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은 자녀에게 관심을 가진 아버지로의 회복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주목할만한 양상은, 자녀들에게 성교육을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 안에서 성교육을 받지 않은 소녀들이 혼전에 임신하기가 쉽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기가 더 쉽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성교육은 '가정 안에서' 반드시 행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렇다면 성문제는 근원적인 가정의 불행과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즉 친밀감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가정에서의 대화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음담을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부모들은 적당한 용어를 사용해 올바로 가르쳐주고, 그 낱말이 뜻하는 바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성행위는 소중히 다루어지는 것이며 음탕한 것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단순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들이 인정하지 않는 언어는 가정에서 설자리가 없다. 성의 가치를 나누기 위한 가장 쉽지만 가장 효과가 없는 방법 중의 하나는 성에 관한 책을 한 권 선택하여 그 책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기 하지만 참된 대화를 촉진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접근법에 약점이 있다.

1999년 11월 27일-28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행복한 가정운동에서 주최한 제 1회 국제생명운동 한국대회의 주제, 자연가족계획 배란법 중에서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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